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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 27일 토요일

국민의힘이 해체돼야 할 이유 중 하나


 국짐당이 해체돼야 할 이유 [하나]

 

국민의힘(국짐당;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나몰라하며 남쪽을 또 반쪽으로 나눠버린 국민의 짐 당)이 해체돼야 할 이유를 하나씩 앞으로 적어나가기로 한다.

광주와 호남지방이 한 묶음이 되고,

대구와 경북이 한 묶음이 되고 있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200여 여성의 인격을 앗아간 色魔(색마) 박정희가 독재를 시작하면서 경북 쪽으로 산업단지를 모아놓기 시작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고속도로를 놓는 것도 서울 부산 간으로 먼저 기획을 한 것을 보면 자신의 출신지역 주민들부터 잘 살게 하려는 의지가 왜 없었을까만,

유독 호남지방은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게 한 것은 틀리지 않았으니 호남홀대라는 말이 그 시절부터 나오기 시작한 것을 누가 아니라고 할까?

많은 역사학자들 중 혹자는 호남지역보다 영남지역의 지역적이고 환경적 빈곤{곡창지대 호남에 대한 빈곤}을 앞세워 박정희 독재정권이 그렇게 정리를 했다는 소리도 없지 않지만 박정희는 경부선고속도로를 놓고 생산시설공장들을 영남지역에 적극 분포시킨 것은 확실하지 않는가?

호남고속도로를 억지로 건설한 것 또한 호남홀대의 이유가 되고 남지!

이제와 생각해볼 때는 그런 시설들이 환경오염의 주범이 된 결과가 되자 들여오지 않은 것이 잘 됐다고 할지라도 그 당시에는 차별을 둔 호남홀대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色狂(색광) 박정희가 19615.16군사정변을 일으키고 난 뒤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겠다던 공약을 어기고 별[star]1년에 두 개를 올려 달고 난 다음 대장으로 전역을 하더니 지가 민간인이 됐다면서,

1963년 제5대 대선에서 막걸리 판을 벌려놓고 특별히 순진한 지방이나 어리벙벙한 지역만 골라 고무신을 나눠주며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그때 투표함을 열었을 때만 해도 전남[그 당시는 광주는 직할시가 아니었음]의 표는 신민당 윤보선 후보가 480,800표를 얻어낸 반면,

박정희 민공당(민주공화당을 공화당이라 불렀지만 나는 민공당)765,712표로 압도적으로 얻어냈다.

물론 경북과 경남도 박정희가 싹 쓸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게 이기고 있었다.

고무신과 막걸리 판 선거의 효과를 얻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호남지역은 박정희와 거리두기를 하지 않았지만,

호남지역이 극변하게 된 것은 박정희의 작품이라는 것은 틀리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1971년 제7대 대선부터는 달라지고 있었다.

 

 



신민()당은 김대중 후보자를 냈고

“10년 세도 썩은 정치 못참겠다 갈아치자

副次(부차) 구호로 경상도 독재정권 타도하자가 또 있었다

박정희 공화당은 그때부터 노골적으로 김대중과 호남지역을 빨갱이로 몰기 시작했으며,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투표 3일 전부터 전라도가 경상도를 싫어한다.’는 유언비어 지라시를 만들어 돌리기 시작하면서 투표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지고 만다.

호남지역은 민주화운동의 발판이 되기 시작했고,

경상도민들은 독재정치도 좋다며 박정희를 옹호하고 나섰다.

경상도민들은 그때부터 독재자 박정희에 대해 경제대통령이라는 딱지를 그들 멋대로 그들의 이마에 붙이기 시작했다.

4.19학생혁명 이후 장면과 윤보선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며 기획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가로채서 박정희 독재정권이 실행한 것을 두고 독재자를 두둔한 것에 양심에 찔릴 때는 지금도 박정희 찬양의 단어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두환 광주학살자는 12.12군사반란을 일으켜 독재정권을 이어가자 노골적으로 전두환을 지지하는 경상도민들의 아둔한 인심을 보지 않을 수 없었던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지 않는가?

그 결과는 어부지리 노태우 정권이 형성되면서 완전히 반쪽이 갈라지고 말았다.

어떤 국민들이 이런 현상을 좋아할 수 있을 것인가?

국짐당이 있는 한 이런 현상을 계속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겠는가?

 

 


정치가 민주적일 때는 어느 나라든지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들은 색마 박정희 유신 독재정치를 감싸기 위해 지금도 국짐당 간판만 달고 경상도와 대구에서 출마를 하면 지푸라기도 말뚝도 당선시키는 지역으로 변하고 말았다.

고로 수많은 국민들은 이번 대선에서도 경상도와 대구에서는 윤석열 국짐당 후보자에게 수많은 표를 던질 것으로 내다보지 않을 수 없다.

저들이 합당한 사람에게 표를 몰아준다면 이해가 될 수 있지만 박근혜 같은 어정쩡한 인물에게 박정희의 딸이라는 것만 앞세우는 것이 민주주의 발전에 어긋나는 일인데도 끝까지 옳다며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은 사려 깊은 사람들에게 질리는 이유이다.

 


 

<닉네임을 등록해 주세요>라는 ID소유자가 오마이뉴스가 보도한,

‘"사과 받으러 쫒아갔나.." 전두환 사망 다음날, 세상 떠난 노교수라는 제하의 보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려놓은 것을 보고 동감하지 않을 수 없어 글을 만든다.

 

곽상도가 다음 총선에 국짐 간판달고

대구로 출마하면 또 당선이다 ㅋㅋㅋ

 

대구경북 X들아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건데 니X들이 다들

상류층으로 잘산다면 몰라도

어째서 하루하루 근근히 먹고사는 것들이

기득권 보수냐?

이 천하의 X돼지 X들아

 

이것들이 반세기동안

국민의짐당만을 주구장창 미친듯이

뽑아재끼는 이유는 다름아닌 국짐당

뿌리가 박정희,박근혜란 이유하나로

그저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것들임"이라는 글을 적고 있었다.

기사 내용과 댓글 내용과는 다르지만 그 말의 의미가 틀리지 않아 앞으로 국짐당이 해체돼야 할 일들을 생각이 날 때마다 하나둘 적어나가기로 한다.

또한 전두환이 분명 국가에 悖惡(패악)질을 했는데도 경상도라는 간판 때문에 그들을 옹호한다는 것은 人倫(인륜)을 어기는 일이 아니고 무엇인가?

전두환은 물론 노태우도 죽는 그날까지 자신들이 잘못된 일을 했다는 것을 반성하지 않고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인간들을 정말 존경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보는가?

인간의 탈을 쓰고 인간의 존엄을 따질 수 있는 인륜만을 따지는 지역의 주민들로서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을 정말 못 느낀다는 것인가?

그러니까 국짐당만 없어지면 경상도 주민들도 제정신을 차릴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기 위해서는 국짐당은 해체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전두환 노태우가 人倫(인륜)을 어겼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오마이 뉴스가

‘"사과 받으러 쫒아갔나.." 전두환 사망 다음날, 세상 떠난 노교수라는 제하의 글이다.

 

[전두환 사망] 5·18 상징적 인물 #노희관 명예교수 24일 사망.. "저승에서라도 사과 받기를"

[신나리 기자]

 

 

 


26일 노희관 교수가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됐다.

노광훈씨 제공


"전두환의 사망 소식을 오전에 뉴스로 들었는데, 오후에는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받았어요. 아버지는 끝내 전두환에게 사과 한마디 듣지 못하고 떠나셨죠."

노광훈(59)씨가 '아버지의 죽음'을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5·18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노희관 전 전남대 명예교수가 24, 항년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전두환씨가 사망한 다음 날이었다.

 

아들 노광훈씨는 27<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빈소에서 조문객들이 아버지가 저승에서 전두환을 심판하러 갔나보다라고 했다"라면서 "제발 그곳에서라도 사과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19805월 당시 노 전교수는 전남대 교수로 재직하며 학원자율화를 위한 시위에 참여했다. 계엄령이 내려진 광주에서 그는 학생들과 함께 금남로를 누비며 민주주의를 외쳤다. 자신이 사용하던 심리검사실을 학생들에게 빌려주며, 전남대 학생들의 집회계획을 돕기도 했다.

 

과거 송선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노 전 교수는 교수직을 걸고 선뜻 심리검사실의 열쇠를 내어주었다. 그곳에서 5·18민주화운동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노 전 교수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시위에 직접 참여하고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도운 대가는 참혹했다. 5.18 이후 노 전 교수의 수배령이 떨어졌고, 보안사는 집까지 찾아와 가족들을 감시했다. 노광훈씨는 "보안사가 집을 무단 점거하면서 학교도 못 가게 했다. 당시 고3인 나와 7, 8살인 동생들이 벌벌 떨며 집에 갇혀있었다"라면서 "국민을 지켜주는 게 국가라는 가치관이 한 번에 뒤집혔다. 다시 떠올리기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고 말했다.

 

보안사가 집까지 점거하고 있다는 소식에 결국 노 전교수는 광주민중항쟁 진압작전의 실질적인 지휘본부이자, 잔인한 살상이 벌어진 505보안부대에 직접 찾아갔다. 민주인사와 학생운동 지도부, 시민군 등과 함께 투옥된 그는 19807월 전남대학교에서 강제 사직되기도 했다.

 

노광훈씨는 "아버지의 투옥과 사직으로 집안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19844월 아버지가 복직되기까지 4년여 가족 모두 생활고를 겪으며 힘들게 살았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광주의 5.18, 모욕당하지 않기를..."

 

 


5·18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노희관 전 전남대 명예교수가 24, 항년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노광훈씨 제공

이후 노 전 교수는 광주의 여러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에 참가했다. 5·18 진실규명은 평생 그가 해결하려했던 숙제였다.

노광훈씨는 "진실규명의 한 축은 전두환의 사과였다. 아버지는 전두환이 단죄받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기도 전에 당신이 먼저 쓰려졌다"라면서 "2년 전 뇌경색으로 건강이 많이 악화돼 돌아가시기 전까지 인지능력이 거의 없었다"라고 말했다.

 

결국 투병생활을 하던 노 전 교수는 24일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후 그는 26일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됐다. 유족들과 고인의 지인을 비롯한 5·18 단체 인사들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노 씨는 "함께 민주주의를 외치던 사람들과 함께 묻혀 아버지가 외롭지 않을거 같아 다행"이라면서도 "전두환 장례식장에서 5·18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들었다. 여전히 진실을 왜곡하는 자들의 말들을 보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사람들이 더는 광주의 5월을 모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강조했다.

https://news.v.daum.net/v/20211127202100119

 

 

참고;

https://cafe.naver.com/auranote/9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