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28일 수요일

세월호 7시간 박근혜 행적과 박정희




박정희의 피는 너무나 진했다

독재자 박정희는 청소년 시절
어렵게 들어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경북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직을 수행하면서 출세만을 위해 만주로 떠나,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확실히 하겠습니다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중략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라는 혈서를 작성하여
만주국육군군관학교의 2기 시험에서 합격자 240명 중 15등으로 입학하며
일본인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1942년 예과를 수석으로 졸업하면서도
"대동아 공영권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라고 선서하면서,
만주국 황제 푸이에게 금장시계를 사은품으로 수여 받고
일본육사 유학생대에 편입 특전 했던 그는 완전 일본인이 돼갔다.
1944년 4월 일본육사 57기를 3등으로 졸업한 다음,
견습생 군관으로 관동군 635부대에 배치된 3개월 후 정식 일본 소위가 된다.
대한민국의 독립군이 한창 성행하고 있던 만주벌판에서
박정희는 출세만을 위해 독립군을 때려잡고자 일본 천황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韓民族(한민족)에서 스스로 탈출하고 있었다는 역사인 것이다.
그는 20대 청년 당시부터 한민족이 아닌 일제의 정신적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피는 그 자식들에게 전해진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일반상식이다.
그가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총력을 다 했다고 자부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

 

독재자 박정희는 항상 출세만을 위해 살았다.
일본이 세운 만주국에서 일본 소위가 돼 팔로군(독립군과 함께한 중국군)
공격한 소대장이다.
탁월한 지휘능력을 인정받은 박정희는 1945년 7월 중위가 되어,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8월 작전 중 일본은 패망한다.
일본 보병 8단은 중국군에 의해 무장이 해제된다.
박정희는 그 틈에 도망쳐,
대한민국 광복군이
일본군과 만주군에 소속되어 있던 장교 경험자를 모집하자,
신속하게 일본을 배반하면서 대한민국 광복군으로 변신하게 된다.
출세만을 위한 청년 박정희는 정신 신분을 수시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는 대목이다.
대한민국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가 지휘하는
1대대(평진대平津2중대장에 임명된 박정희는 광복군 장교로 변신한다.
1946년 4월 평진대(1대대)가 해산되자,
미군 수송선을 이용하여 그해 9월 부산항으로 가까스로 귀국한다.
거지가 돼 돌아온 박정희는 이웃의 눈치도 아랑곳 하지 않고,
출세만을 위해 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해 3개월 단기과정을 마치고
12월 14일 2기로 졸업한 다음
남조선국방경비대에 들어가서 포병 소위가 된다.
정신적으로 일본군이 된 청년 박정희는
일본이 패망하자 졸지에 그 꿈을 접고 배반했던 한민족이 된다?
청춘 시절에 다짐했던 思考(사고)는 쉽게 바뀔 수가 없는 것이다.


박정희는 공산주의자였던 셋째 형 박상희를 위해서도 살았다.
박정희가 군 생활 중에,
공산주의 이념에 흠씬 젖어있던 셋째 형 박상희가 경찰에 의해 죽자,
형에 대한 복수심과 이재복의 권유로 남조선로동당에 들어가
국군 내 남로당 프락치들의 군사총책으로 활동했.
남로당 활동 중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에서 감행했던 작전 중에
가장 큰 규모로 가장 성공적인 정부 전복 기도사건(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침투사건)을 지도했다고 나무위키는 적고 있다.
국가를 전복하려는 의도를 품은 것이 일본국의 정신적인 피가 흐르지 않고서야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출세를 위해 박정희는 나라까지 뒤집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결국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켰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
국민을 가차 없이 짓밟으면서 독재정치로 이끌었다.
그의 청소년 시절 일본을 우러렀던 상념 속에는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애착심이 있었다고 볼 수 있을까?
그가 18년 독재 집권 중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163명의 사망자를 낸 대연각 호텔 화재사건이 일어났을 때
박정희가 직접 찾아가 지휘를 했다고 하는데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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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 건물을 지을 생각이라면 화재가 날 것까지 상상도 할 수 있을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생각의 미숙이었을까?
소방 사다리차조차 준비가 없었던 시절
옥상에 헬리콥터 포트(Heliport) 자리조차 마련하게 하지 않았던 행정을 했다?
그저 주먹구구식 행정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1970년 12월 14일 발생한 남영호 침몰사건도
선령은 2년으로 선체도 큰 편이었지만,
사고 당시 정원 302명보다 36명을 초과시켰고,
화물도 540t으로 이는 적재정량의 4배 가까이 되는 양이었다.
이 때문에 남영호는 성산포항을 떠날 때부터 좌현으로 10도 정도 기울어져
사고가 날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결국 326명이 사망했고,
재산 피해는 선체와 화물가격을 포함해 그 당시 액수로 1억 700만원에 달했다.
대한민국은 오래 전 해양사고를 당했으면서도
그 사고에 대한 교훈을 가다듬지 않아 크고 작은 사고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명박근혜는
18대 대통령 직을 법률에 의해 온전하게 인수인계를 하지 않아서였는지,
박근혜가 일본의 정신적 사고를 이어 받은 아버지 독재자 박정희의
피를 이어받아서인지,
2014년 4월 16일 아침 8시 05분 경부터 세월호는 진도 앞바다에서
기울고 있었다.
아침 8시 54분이 지날 때는 좌현으로 30도나 기울고 있을 때,
청와대를 지켜야 할 박근혜는 침실에 그대로 있었다는 검찰 보고가 나왔다.
9시를 넘겨 20분이 돼가는 시각
당시 비서실장이던 김기춘과 행정관 일행은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다는 뉴스의 자막을 TV로 보고 있었고
박근혜는 계속 침실에서 꿈적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즉 구조의 황금시간[Golden time]이 다지나간 10시 20분이 지날 때
상황병을 통해 세월호 참사가 전해질 때는 배는 이미 108도를 넘게 기울어져
침몰됐을 때라고 검찰은 보고하고 있다.
국가를 책임졌다는 사람이 휴일도 아닌 월요일 아침 근무시간에
청와대 관저 침실에 그대로 있었다는 말이다.
죽을병이 들었다고 해도 국가를 책임지고 있다면
그렇게 느긋하고 태평할 수 있을까?
세월호 사고 당시 박근혜의 7시간은 청와대에 있었으면서
300여 국민이 물에 수장이 되고 있었는데 모른척하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경향신문에서)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최순실을 오후 2시 15분에 불러들여
3시까지 그 문제를 논하고 있었다니 청와대 직원들은 녹봉만 축내는
멍청이들만 있었다는 것 같다.
그 때부터 몸단장 머리단장 다하고 난 다음
중앙재해대책본부로 오후 5시 15분에 도착했다고 한다.
책임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고 제 임무가 무엇인지도 모른 사람?
그 사람의 행적을 감추기 위해
박근혜 청와대는 그날부터 위증할 기획을 짜기 시작했다.
세월호 사건 당시 청와대의 박근혜 7시간은 꾸며지고 있었다고 한다.
고로 위증죄까지 받아야 할 것이다.


처음부터 돼서는 안 될 사람을 청와대로 보낸 것이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비서실 직원들은 다 나와 근무를 하고 있는데
침실에 남아 무슨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다.

전 국무총리 김종필이 박근혜를 두고 박정희 말도 듣지 않았던 아이라고 했다.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과 박근혜가 어울리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만큼 속을 썩이고 컸다는 말이 된다.
아버지가 모범이 되게 처신을 하지 못한 탓이 있었다고 본다.
잘 알다시피
색마 박정희는 육영수에게 많은 마음의 상처를 주었다는 비화가 있지 않나?
위에서 적었듯이 박정희 청소년 시절
출세만을 위해 갈망하며 살아왔던 삶의 변천에서 보듯
대한민국 국민은 그의 가슴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오직 자신의 영달과 성적인 욕구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권력을 쥔 손을
놓지 않으려고 갖은 고통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 피의 여파가 그대로 박근혜에게 넘어가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다.
박근혜의 세월호 7시간 동안 무책임의 원인은 결국 박정희로부터 아닌가?


부모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청소년 시절을 우리는 기억한다.
부부 싸움질만 하고 기른 아이들은 커서 그대로 따라하고,
부부가 금실 좋게 살아온 아이들은 그대로 평화로운 생활을 유지하며,
부모가 대외적으로 싸움질을 잘한 아이들은 내 집 사람과
남의 집 사람 구분먼저 하며 살아간다고 하지 않던가!
심심하면 청와대 담배 재떨이가 비행하였고,
들려오는 말마다 학생들 데모 막아내는데 총칼이라도 써서 막으라고 했던 전화소리를 박근혜가 못 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처음부터 국민을 아끼는 마음이 없었던 박정희다.
박정희의 피는 너무나 진했다.
그 피의 흐름은 이제 끝이 나고 있는 중이다.
더 이상 무능과 무책임의 독재는 이 땅 위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일어나서도 안 된다.
한반도 남한의 독재는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에서 끝이 났고,
이명박근혜가 그 혈맥을 이어가려고 발악적인 힘을 썼지만,
1,700만 개 촛불혁명의 힘은 그 파열을 막았으며 평화가 영원할 것으로 본다.


다음은 한겨레신문 보도 내용 일부이다.
2014년 416일 탑승객 476명을 태운 세월호가 침몰하던 그 시각국가위기 상황을 최종 책임져야 하는 대한민국 대통령은 그 누구와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최초 신고가 이뤄진 오전 854분부터 배가 좌현으로 108도 기울어져 더는 구조가 불가능해진 오전 1017(골든타임)까지박 대통령은 세월호 침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도대체 대통령은 뭘 하고 있었던 걸까28일 검찰이 4년 동안 이어진 이 질문에 한층 진전된 답을 내놓았다. ‘7시간의 봉인이 마침내 풀린 셈이다.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과 김장수 국가안보실장 등 청와대 수뇌부는 오전 919분 텔레비전 자막을 통해 사고 소식을 처음 접했다이후 국가안보실 산하 위기관리센터가 선박의 명칭승선 인원출항시간 등을 담은 상황보고서 1(초안)을 10시쯤 작성했다금쪽같은 ‘41이 보고서 작성으로 속절없이 흐른 것이다이 시각 세월호는 점점 더 기울어져 복원력을 상실(934)했고이어 3층 갑판(47), 4층 갑판(50), 5층 출입문(57)이 침수됐다.

초안을 보고받은 김 실장이 대통령 휴대전화로 두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대통령은 두 번 모두 받지 않았다다급해진 김 실장은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보고서 1보가 관저로 올라갈 예정이니 보고될 수 있게 조치해 달라고 부탁했고, 1012~13분께 상황병을 통해 대통령이 그때까지 머물고 있던 관저로 ‘1를 전달하도록 했다.(한겨레;2018.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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