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7일 화요일

양승태 사법부는 이명박근혜 결정체?



이명박근혜 정권의 정치 사법부의 暗黑期(암흑기) 9년의 슬픈 역사

이명박이 대통령이 된다고 설치고 다닐 때 수많은 사람들이 막아야 한다고 했지만 결국 막아내지 못한 것을 대한민국의 운명이라고만 해야 할까?
누구의 탓이라고 하기 이전 한반도의 운명부터 따져야 하지만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登極(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모조리 북한의 가난한 삶이 만들어낸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1991년 소비에트연방(소련)이 해체되자 전쟁준비에만 狂奔(광분)해 있던 김일성 집단은 의지할 곳을 잃었고 북한 주민들은 끼니조차 챙길 수 없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남북통일을 이뤄야 한다며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할 때부터 문제는 발생하고 있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북한을 향해 앞뒤 가리지 않고 국민의 怨聲(원성)도 들은 채 만 채 북한 주민들의 고통만 보였는지 사정없이 퍼주고 있었기에 국민들은 세상을 뒤집자고 했고 결국 뒤집히고 말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화의 발판은 마련했다고 하지만 북한에 퍼 준 대가로 북한이 2006년 1차 핵실험을 한 것은 진보정치에 대한 敗亡(패망)에 가장 큰 禍根(화근)이 됐다.
북한이 남한을 향해 원자탄을 발사하게 만든 정부로 일순간에 뒤바뀐 나머지 변명 한 마디 할 수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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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은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 탓만 아니다.
그 위로 더듬어 올라가면 한반도를 갈라 논 일본 제국주의(일제)가 그 원천이다.
더 올라가면 일제가 침략하기 좋게 대한제국을 高宗(고종)이 감당해야만 했던 것도 문제였다.
단호한 판단력이 없었기에 이완용 같은 賣國奴(매국노)에게 국가체제를 넘겨준 그 자체도 문제이고 그렇다고 나라를 넘기면서까지 제 욕심만 채우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 일본과 협작(挾作=협잡)했던 그런 인물이 한반도 땅에 태어났다는 것도 문제꺼리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북한에 매국은 하지 않았지만 그와 동등한 위치까지 국민들이 상상할 수 있었다는 것도 우리는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過去事(과거사)로 넘겨 민주화에만 인간 노무현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은 분명히 집고 가야 하는 것이다.
국민이 지금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아직도 그 당시를 잊지 못하는 인물들이 10%p 이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으로 본다.
자유한국당(자한당)을 지금 이 순간에도 지지하는 이들을 계산하면 그 수치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정치를 다 잘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의 원성에 항상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잊고 정치를 하는 이는 결국 敗亡(패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노무현의 봉화산 부엉이 바위 죽음이 패망을 말해주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문재인 대통령으로 인해 지금은 조금 이해해주려고 하는 국민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아직도 그의 고집적인 집권 당시를 잊어버리지 않는 이유를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명박근혜도 국민의 원성에 조금만이라도 귀를 기울였다면 지금 囹圄(영어)의 몸이 됐을까?
邪慾(사욕)에 빠졌던 두 사람의 행보를 우리는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은 국회도 망쳐 논 그대로이고 사법부까지 거의 瓦解(와해)될 정도로 권력을 낭비하고 있었다.
국회나 사법부가 정보기관도 아닌데 독재정권에서나 쓸 수 있었던 영수증 없는 특수활동비(특활비)를 멋대로 국가 예산에 책정하게 하여 국민의 혈세를 눈먼 돈으로 만들어 쓰게 한 장본인들이다.
이명박근혜가 國庫(국고)를 私庫(사고생각하지 않았다면 저들이 묶인 몸이 됐을까?
이명박근혜는 똑 같은 인물들이다.
국민을 국민으로 생각만 했다면 사법부가 私慾(사욕)을 취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망가져 있었을까?

 

오늘도 양승태(이명박이 임명하고 박근혜와 협작한 인물?) 사법부의 오점은 또 터지고 있다.
국회는 여야 할 것 없이 모조리 썩어있었기에 말할 것도 없이 선거를 해서 (판갈이를 해야 할 것이지만 도적이 그 판에 올라가 선량한 국민들을 밀어내고 있으니 처치할 힘도 없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의장 짓을 할 수 있을지 모를 정도로
특활비며 업무추진비특정업무경비예비금(행정부의 예비비와 비슷한 항목이다), 입법 및 정책개발비정책자료집 발간·발송비의장단 정보위원회 해외출장비에서 자유롭지 못한 국회에서 선봉으로 쓴 사람이다.
그 예산의 사용처와 지출증빙서류를 공개하라는데 꿩 구어 먹은 소식이다.


노무현 정부 당시인 2004년에 대법원에서 특활비는 한 번 확정판결을 받았다공개해도 별 문제가 없으니 공개하라는 것이 대법원의 판결내용이다.
그러나 여야 의원들은 국민의 세금으로 변호사까지 사가며 항소하고 있는 중이다.
오마이뉴스는
국회라는 기관 자체가 '()국가기관'이다.
대법원 판결을 무시하는 것은 국가법질서를 무시하는 것이고,
국민세금을 쓰면서 최소한의 정보공개도 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세금도둑'임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


양승태 사법부는
대법원에서 파업 노동자를 업무방해죄로 처벌한 판결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한정위헌 결정을 내리려고 한다며 이를 막기 위해 박근혜 정권에 공문을 넣어 헌재 판결을 방해한 때문에 6년째 헌재에 계류 중에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박근혜는 왜 대통령 자격을 얻었을까?
자기 아버지인 독재자 박정희 色魔(색마)의 그늘 덕도 크게 보았지만 이명박 정권의 국정원 댓글로 인한 비상식적인 선거(올바른 사법부 같으면 부정선거로 인정)에 의해 정권을 잡을 수 있었기에 국민이 지금껏 헤매며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결국 두 사람은 監獄(감옥)에 갇혀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양승태와 박근혜는 너무도 국민을 우롱하고 있었다.
이명박근혜 정권이 지명한 대법관들을 앞세워 온갖 나쁜 짓을 일삼았으니 그 후유증이 어디로 갈 수 있었을까?
모조리 국민(서민)에게 넘어간 것 아닌가!
그러나 저들을 처리하기가 쉽지 않다.
8월 6일 김선수·노정희·이동원 신임 세 대법관들이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아 진보성향 대법관이 8(김명수 대법원장 포함)으로 됨에 따라 전체 14명 중 과반수가 넘게 돼 앞으로 대법원에서 정의로운 판결이 성행 될 것으로 기대는 하지만 국민의 대다수는 사법부를 믿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6명이나 박근혜 정권이 뽑아 논 대법관이다.
아주 찜찜한 인물들이 6명이나 있어 정치판사 냄새를 풍기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가정이나 사회나 국가나 사람이 잘 들어와야지 좋지 못한 사람이 들면 다 똑같이 그런 물이 들어 결국 우물물을 온통 탁하게 만들고 만다는 말이다.
그러나 악질 중 악질인 양승태를 처벌 할 수나 있을까?
아직은 어림도 없다.
현직 판사들이 모조리 흙탕물을 같이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전 흙탕물이 가셔지려면 수많은 날들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어찌됐건 양승태만이라도 이명박근혜와 같이 監獄(감옥)소에 가두었으면 하는데 문재인 정부 사법부가 그런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만 들게 한다.
양승태 정말 싫다.
그가 처음으로 사법부 특활비를 박근혜와 같이 만들어 썼으니 말이다.
그 돈으로 박근혜 정권 국정원장들처럼 박근혜에게 상납한 사실은 없었을까?

 

박근혜는 국정원 특활비를 받아낸 것이 뇌물로 되지 않아 형이 많이 줄었다.
하지만 그녀는 32년의 징역을 살게 된다.
김영삼처럼 대통령 特別赦免(특별사면특사)을 남발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박정희 독재시대부터 검찰에서 승승장구하던 김기춘이 석방되자 사회단체는 울분을 토할 수 없으니 그가 타고 가야할 차 앞 유리창으로 굴러 떨어지며 몸을 던지고 있었다.
차창 앞 유리가 온통 금이 가고 말았다.
김기춘 80평생 그만한 모욕은 없었을 것이다.
그보다 김기춘이 석방된 것을 두고 국민에 대한 사법부의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도리어 더 많았을지 모른다.
그만큼 국민들은 사법부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고등법원에서 김기춘 4년 징역 선고를 받아놓고서도 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김기춘은 대단한 인물이었을까?
양승태 사법부가 정말 밉다.
양승태 사법부는 이명박근혜 정권의 결정체 이었으니까!
최소한 대법원에서 나머지 6명 대법관들까지 교체가 되지 않고서 사법부를 인정할 수 없는 현실이 더 두렵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서 1년 3개월이 지나고 있는 이 시점에서도 이명박근혜의 자취는 수없이 남아있다.
그 자취는 문재인 정부가 끝나도 쉽게 거치지 않을 것으로 미룬다.
결국 문재인을 이어 제2의 진보셩향 政治家(정치가)가 대권을 이어갔을 때 그들의 썩은 내가 사라지지 않을지 생각한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에도 아직은 대권을 이을만한 참신한 인물은 나오지 않은 것 같다.
아직도 김대중과 노무현의 자취를 밟아야만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 슬프다.
개성적인 정취의 정치인들이 있어야 하는데 지방색깔 때문에 맑은 보석이 빛을 찾지 못한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지역색깔 그건 국민들이 만든다는 것을 알자!
민주당에 당 대표 후보 중에도 친 문’ ‘친 노는 있지만 친 국민이나 친 국가적인 인물은 없다.
자한당과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다.
자한당도 진 박’ ‘친 박만 있지 친 조국이나 친 국민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는데 여당도 그렇고 그렇더라!
이번 기회에 정의당이나 실컷 선전을 했으면 한다.
그 들 중에는 새로운 인물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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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6일 월요일

여성독립운동가 26인 73주년 광복절에 빛을?



과거 여성들의 간접 사회활동 참여를 인정하는 사회가 좋다

내 어머니들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이만큼 성장했을까?
남성들만의 힘으로 이만큼만의 대한민국의 성장을 인정하겠다는 생각을 지금껏 하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직접적으로 사회에 물어보고 싶은 문제의 사항이 아닌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들이 수없이 많아졌다는 것을 우리는 스스로 인식하며 산다.
과거 사회를 질책하고자 하는 생각은 아니지만 여성의 사회참여를 두고 많은 남성들이 수긍하지 않았던 시절이 한반도에 널려 있었다는 것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었지 않은가?
그 중에서도 깨어난 인물들은 여성 없이는 사회가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고 남녀 구별 없이 사회 참여에 적극적이던 인물들이 있었으니 대한민국 수준이 지금에 닿게 된 사연 아닐까싶다.
그래도 우리 어머니들은 남편의 성공이 자신의 성공인양 남편의 성공을 위해 갖은 고생도 생활의 일부로 일삼았던 시절은 분명 있었고 사회는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으며 남성들만의 성공으로 인정하고 남성우월주의 함정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시절은 분명 있었다.
그 여파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 여성들이 분을 삭이지 못하고 남성혐오주의를 내세우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숨어지고 있었지만 일깨워 여성들의 苦楚(고초)를 인정하려는 사회가 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스스로 이해하며 自重(자중)하는 자세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
그 시대를 살아온 우리 어머니들을 우리가 긍정해드리지 못한다면 어찌 현실 사회에 함께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잘 알다시피 도를 지나친 儒敎的(유교적사상에 흠모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성은 삼부종사 즉 三從(삼종)의 ()이라는 사상을 내세워 이조 500년 역사도 모자라 일제 강점기까지 그 여파는 이어지며 해방 이후에도 끊이지 않게 여성들을 苦役(고역)시키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로 인해 여성들은 남편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으로 대리만족하는 사회에서 살아야 했다.
그런 대리만족을 위해 지금 어머니들 중에는 자신의 아이들에게서 느끼려고 갖은 애를 쓰며 치마 바람을 일으키는 여성으로 변하고 있는지 모를 일도 서울의 강남지역 등에서 벌어지고 있지는 않는지?
어찌됐건 과거 어머니들의 힘으로 대한민국의 눈부신 발전이 있었다는 것을 긍정하는 자손들이 우리라는 것을 알기에 이제부터라도 그 여성들의 숨은 공덕을 찾아 보답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과거 우리 어머니들 중에는 정확한 이름도 없이 아버지의 성씨만으로 이름을 대신하던 이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다.
삼부종사라는 怪異(괴이)한 사고를 만들어 낸 남성들이 문제였던 시대의 산물?
그 때문에 김 씨나 이 씨 박 씨 등으로만 이름으로 했던 여성들이 적지 않았었다.
그래도 많은 여성이 성과 이름을 정확히 갖춘 여성들도 있어 다행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그렇게 숨어 지내야만 했던 때문에 과거 독재정권들은 여성 비하의 사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남성우월에만 더욱 박차를 가하지 않았던가?
분명히 말하지만 지금처럼 박정희 독재자는 물론 이승만과 전두환도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사고를 우리에게 일깨우는 일은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것이 定石(정석아닌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아내이자 독립운동을 지원한 이은숙 여사(왼쪽). 항일 독립운동으로 투옥된 시아버지와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며 가족의 삶을 지탱했던 고 박애신 여사(오른쪽). 일조각·대한민국역사문화원 제공

 
이번 광복절 독립유공자’ 명단에 포함된 분 들 중에는 여성 유공자들이 많다.
시대의 변천이 아닌 사고의 변천을 실천으로 옮기고 있는 정부가 되고 있음이다.
‘‘우당의 아내’ 이은숙 여사건국훈장 받는다는 경향신문 제목에,
여성 독립운동가 고 이은숙 여사(18891979)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된다이 여사는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아내다만주를 거점으로 한 독립운동을 지원했지만 그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광복절 독립유공자’ 명단에 포함
이 여사남편보다 56년 늦은 추서

이 여사는 오는 15일 열리는 73주년 광복절 및 정부 수립 70주년 경축행사에서 정부 포상을 받는 독립유공자 177명 명단에 포함된 것으로 6일 확인됐다국가보훈처 관계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될 예정이라고 밝혔다포상자 중 여성 독립운동가는 26명이다무장독립운동에 헌신한 고 허은 여사(건국훈장 애족장)와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을 지원한 고 신창희 여사(건국포장등이 함께 포함됐다.
 
이 여사는 우당과 결혼한 지 2년 만인 1910년 12월 서간도로 이주했다해외에서 독립운동 터전을 일구겠다며 나선 길이다품에는 1년도 안된 딸이 안겨 있었다우당 등 6형제는 모든 가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옮겨 와 독립운동을 했다당시 처분한 돈이 약 40만원현재 화폐가치에 따라 환산하면 최소 650억원이다우당이 주도해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청산리전투를 비롯한 독립운동의 주축이었다.

이 여사의 삶 자체가 독립운동의 기반이 됐다회고록 <서간도 시종기>에는 녹록지 않았던 만주의 삶이 녹아 있다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은 뒤 꾸려야 했던 가족의 삶은 곤궁했다. “잘 해야 일중식(하루 한 끼만 먹음)이나 하고 그렇지 않으면 절화(밥을 짓지 못함)하기를 한 달이면 반이 넘으니 생불여사(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한 삶)로다라고 이 여사는 회고했다이런 환경에서도 매일같이 방문하는 독립운동가들을 헌신적으로 지원했다.

직접 국내로 들어와 독립운동 자금을 구하기도 했다. “매일 빨래하고 만져서 주야로 옷을 지어도 한 달 수입이란 겨우 20원가량 되니그도 받으면 그 시로 부쳤다매달 한 번씩은 무슨 돈이라는 건 말 아니하고 보내 드렸는데우당장(이회영)께서는 무슨 돈인 줄도 모르시면서 받아 쓰시니우리 시누님하고 웃으며 지냈으나 이렇게 해서라도 보내 드리게 되는 것만 나로서는 다행일 뿐이다.” 우당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이 여사가 독립운동을 지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을 받기까지는 56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던 셈이다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이들의 손자다.

이 여사는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사의 이면에 가려져 있던 여성들 중 한 명이다총칼을 들지 않았더라도이들의 신산한 삶은 독립운동을 지탱하는 단단한 축이었다.

사단법인 대한민국역사문화원은 이번에 여성 독립운동가 202명을 새로 발굴했다국내 항일운동에 참여한 사람이 75명으로 가장 많다이어 학생운동 36, 3·1운동 35만주 방면 17중국 방면 13명 순이다.
 
의열단원 남편 지원한 박애신 등
항일운동사 이면에 가려진 이름들
역사문화원여성 202명 새로 발굴
여성 참여 없이는 지속 불가능했다

새로 발굴된 고 박애신 여사의 삶은 당시 여성의 기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그는 독립운동가인 의열단 김태규 선생의 아내로 고단한 삶을 살았다. 1919년 39일 결혼 직후부터 시련이었다. 3·1운동에 참여한 시아버지 김병농 목사가 바로 투옥됐고남편은 잠적했다시아버지의 1년 옥바라지가 끝날 즈음2의 3·1운동을 꾀했던 남편 역시 일제에 붙잡혀 다시 옥바라지가 시작됐다.

석방된 남편은 몇 달 뒤 독립운동을 위해 떠났다집 주변에는 늘 감시와 미행의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1922년 전갈이 왔다. “모월 모일 어느 역을 지나가게 되었소아이를 낳았다는데 얼굴을 보고 싶으니 기차역에 나와주면 좋겠소.” 젖먹이 아이를 업고 기차 차창을 통해 만난 것이 마지막이다생사 여부도 알 수 없었던 남편의 사망신고일은 1922년 31일이다박 여사는 1969년 생을 마감했다.

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장은 박 여사와 같은 여성을 몹시 운 없는 여성으로 치부하면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다시 그런 상황이 오면 절대 그런 삶을 살지 말아라그 긴 터널의 끝에는 어느 한 사람 네 수고와 희생을 기억해 주는 이 없는 허망함뿐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라 했다.

 
1919년 310일 만세시위에 나섰던 광주 수피아여학교 학생들대한민국역사문화원 제공

여학생이 주도한 만세시위도 기억해야 할 대상이다광주에선 1919년 310일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교사와 학생 23명이 구속됐다. 10일 뒤엔 천안 광명여학교, 3·1운동 1주년인 1920년 31일엔 서울 배화여학교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불렀다2의 3·1운동을 일으키고자 한 국내외 노력의 한 부분이었지만이 사건과 관련된 24명의 배화여학교 학생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졌다.


이 원장은 독립운동이 반 세기두 세대 또는 그 이상의 희생을 요구하는 긴 기간이었기 때문에 여성의 참여와 지원 없이는 지속불가능했다고 말했다지난해 말까지 독립유공 포상자 14830명 중 여성은 296(2%)이다.(경향신문;2018-08-06 21:20)

 

시아버지와 남편의 옥바라지 남편과 가정의 뒷바라지 그게 없었다면 남성들만의 성공이 있었을까?
愛之重之(애지중지)하는 애틋한 여성의 마음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이렇게 눈부시게 성장하여 나아가고 있을까?
한 푼이 아깝다며 스스로에게 쓰는 것을 절약하던 우리 어머니들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세계무대에서 우뚝 설 수 있을까?
깊은 思惟(사유)의 속에서 눈을 감아야 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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