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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4일 일요일

소득주도성장론이 왜 필요한가?



야당 구실도 못하는 야당은 어디에 쓸까?

세상 많은 聖人(성인중에 사랑과 慈悲(자비그리고 儉素(검소)하지 않는 성인은 없다고 본다.
물론 謙讓(겸양)의 美德(미덕)까지 갖춘 분들이기 때문에 수많은 세월이 흘러왔어도 그분들을 본받기 위해 기리게 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세상은 점차적으로 금전만능의 세계 속으로 바뀌면서 성인들 얘기를 하면 비웃는 이들도 있으니 세상인심은 갈수록 탁해지면서 사건사고들이 연일 이어지고 있는 것 아니겠나?
왜 이렇게 혼란한 세상 속에서 생명을 어렵고 힘들게 유지해야만 할까?
잘 정돈되지 못한 情報時代(정보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상생활과 생산 및 소비 활동의 많은 부분이 정보의 활용과 유통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고도정보화사회(高度情報化社會)는 돈[Money]이 그 주체가 되기 때문에 인간들은 돈의 귀중함에만 置重(치중)하게 되면서 자신의 품격을 財貨(재화)로 比準(비준)하려 하기 때문에 욕심의 갈등을 억제하지 못하고 그대로 발동시키는 현상으로 변하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 성인을 云云(운운)한다는 것은 웃기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自矜(자긍)하지만 사회는 아직까지 겸손한 이들을 또 한편으로 좋아하기 때문에 글로 지어본다.


아무리 고도정보화사회가 돈에 의한다고 하지만 평생 번 돈을 장학재단에 寄附(기부)한다거나 장애자를 돕고 빈약한 이들에게 빛을 주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세상인심을 볼 때 그래도 사회는 훈훈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는가?
문재인 정부도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고 몰입하려고 애를 쓰는 것으로 안다.
국민 각자에게 소득을 늘려주면 사회는 건전하게 돌아갈 것을 인정하여 소득주도성장론을 경제정책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야당인 자유한국당(자한당)과 바른미래당(바미당)은 자신들이 여당으로 있을 때 기업의 혁신을 촉발해 경제 발전을 꾀하는 공급’ 중심 정책이 주요하다며 혁신성장만이 살길이라며 입에 거품을 물며 국민을 설득하려고 한다.
국민의 손에 돈을 쥐지 못해 쓸 돈이 없는데 산업만 발전시켜 좋은 재품을 만들어 내는 혁신된 재품들이 널려 있다 한들 그림의 떡일 뿐이지 팔릴 수 있을 것인가!
단 한 푼이라도 서민들에게 돈을 더 쥐어줘야 필요한 물건을 살 것이라고 하여 최저 임금을 올려야 한다는 주장인데 최저시급 10,000원 고지조차 쉽게 오를 수 없는 실정이다.
소상공인들이 소수의 고용인에게 지급할 금액이 최저임금과 맞물려있기 때문이다.
소상공인들이 하는 작은 사업체에서 대기업이 주는 최고의 연봉이 아닌 아주 최저의 임금만 주워왔던 중소기업인들에게 더 큰 부담이 된 최저임금의 장벽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클 대로 다 큰 대기업은 중후한 인물들에게 거대한 연봉을 줄 수 있는 여력을 마련한지는 참으로 오랜 세월 속에 있었다.
독재정권들이 마련해준 덕분이다.
정경유착 즉 정치꾼들과 경제인들 간 돈을 주고받으면서 돈을 잘 벌 수 있는 정보를 제공했던 과거 박정희 정권의 팽창으로부터 세상사는 완전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혁신성장의 근원이 됐던 것이다.
국민들은 내 손아귀에 들어오는 돈은 없어도 박수를 쳐주고 있었다.
국가 경제가 발전했다며 산업훈장을 받는 기업인들에게 쉴 사이 없이 박수를 치고 또 쳐댔다.


대기업으로 변한 대한민국 10대 기업이 차지하고 있는 증권가는 국내 증시의 시가총액(시총) 38%p를 장악하고 있는 현실이다.
1대 기업인 삼성그룹의 시총의 액수만 20%p이다.
삼성 하나가 10대그룹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국가 시총 1/5의 거대기업이다.
삼성전자 주가가 떨어지고 10대기업 주가까지 흔들리면 코스피와 코스닥이 온통 사시나무가 되는 것이다.
삼성의 이병철 전 회장은 자식들에게 기업을 가르치면서 정치인들은 한계의 시기가 있지만 기업이 승승장구하면 영원하다는 것을 가르쳤다고 한다.
대물림 주식이 있는 한 삼성은 영원한 삼성 ()의 재산으로 인정하게 만든 독재정권을 어찌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재벌들에게도 최저임금이 10,000원 되면 그 여파가 적지 않다고 할 것이지만
중소상공인과 비교할 가치도 없을 것으로 본다.
기본 틀이 온전한 대기업과 이제 막 성장하고 있는 작은 사업체 주인에게는 최저임금은 커다란 隔差(격차)가 있다고 본다.
더구나 대한민국 대기업들은 40대가 되기도 전 후배를 위한 勇退(용퇴)’를 권장하고 있어 날로 퇴직자들이 늘어나면서 소상공인들의 수는 200만이 훨씬 넘고 말았다.
대단한 수가 직업이 없어지고 있다는 근본의 뜻을 지닌 것이다.
결국 잘 가꾸어지지 못한 정보시대로 인해 정보가 느린 사람은 정보가 강한 이에게 그 직을 넘겨주고 떠나야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됐으니 세상인심은 더럽게 변하고 있는 것이다.


老子(노자)께서는 慈悲(자비)를 제1의 보배로 삼으셨으며 제보배는 儉素(검소)함이라고 했다.
세상 성인들이 순서를 두어 자신의 지침을 정하지는 않았지만 노자께서는 도덕경 제67장에 당신의 보배가 3가지가 있는데 그 세 번째는 세상 앞에 함부로 나서려고 하지 않는 것[不敢爲天下先(불감위천하선)].”이라고 했다.
도덕경 중에는 당신이 나서려고 하지 않아도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말씀도 종종 한다.
간단히 말해 스스로를 잘 낫다고 하지 말고 가만히 있더라도 내 의지의 방향이 뚜렷하면 주위에서 앞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謙讓(겸양)의 뜻이 濃厚(농후)한 것이다.
노자께서는 그런 정치인을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정치꾼들은 다르다.
자신들이 잘 낫다며 아우성을 치는 것이다.
결국 정치꾼들의 세상 속에 대한민국 정치는 판을 쳤다는 말이다.
독재시대에 나서지 않은 정치인들도 적지 않았으나 기록된 것은 그리 흔하지 못하다.
나서지 않으면 언론이든 역사서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재시대에 들어난 인물들도 수없이 많았다.
대한민국 역사적 인물은 얼마나 될까만,
독재시대 정치적 인물들은 널려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들은 믿을 수 없다.
서점에 가서 책을 들쳐볼 때 정치를 한 인물들이 쓴 글은 보잘 것이 없다.
대학 교수들까지 가만히 두지 않았던 과거 독재시대 정치로 인해 대한민국 속에 얼마의 인물이 온전할 수 있을 것인가?


문재인 시대가 열리고 있지만 공무원들은 이명박근혜 9년을 같이 한 사람들이 전부이다.
어찌 이 두 사람의 정신이 물들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야당 정치꾼들이 소득주도성장론으로 아주 조금씩 다가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이 잘 못 됐다고 아우성 치고 있다.
모든 가정에 아동수당 지급하자고 자한당이 머리를 숙이고 있다.
지난 해 문재인 정부가 내 논 정책을 반대하여 상위 10%를 걸러내느라고 자그마치 1.900억 원이 돈이 낭비됐다고 한다.
상위 10%에게 줄 돈 1500억 원보다 400억 원을 더 쓰게 한 자한당의 멍청한 짓을 보면서 생각한다.
자한당이 없어진다면 세상은 얼마나 더 청명하게 밝아질 것인가!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막으려고만 했던 이명박근혜 정권의 그 이전의 정권들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자들이 있었다고 말이다.
잘 정돈되지 못한 情報時代(정보시대)로 이끌어 온 9년의 정책으로 국민들만 고통 속에서 헤매게 하지 않았던가!



원문 보기;

2018년 7월 14일 토요일

2019최저시급 8,350원의 현실과 과거



30년 역사의 대한민국 최저임금제가 성공하려면

지구촌에서 최소한 150개국 이상이 시행중인,
최저임금제(最低賃金制, Minimum wage system)는 어느 나라든 잡음이 없을 수 없는 일이다.
노동의 代價(대가)를 받는 측인 노동자들은 일을 한 대가치고 賃金(임금)이 적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고,
노동을 시킨 使用者(사용자측은 일한 대가보다 많이 줬다고 하는 때문에 잡음은 끊이지 않는다.
그 중재역할은 일반적으로 정부가 맞는다.
대한민국 2019년 최저 시간 급료는 8,350원으로 결정이 됐다고 한다.
금년(2018) 7,530원 대비 10.9%가 오른 것이다.
2017년 6,470원 최저임금에 비해 2018년은 16.4%는 1988년 시행 이후 4번째로 급상승한 치수이다.
1988년 1그룹은 시급 462.50원을 주고 2그룹은 487.50원으로 差等(차등)을 두고 시작된 대한민국 최저임금의 역사는 서민들에게 적잖은 고통을 준 느낌이지만 잘 견디며 살아온 것 같다.
최저임금제 시작 그 다음해인 1989년부터는 차등을 없애면서 600원으로 시작된 균일 시급의 역사가 슬프게 보아진다.
그 돈으로 어떻게 살라고 했을 것인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최저시급으로 시작된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지금 노동자들에게 주는 돈의 액수가 크다고만 사용자들이 느낀다는 말이다.
그만큼 노태우 정권도 전두환 정권처럼 제 욕심만 앞세워 정경유착에만 總力(총력)을 다했다는 느낌을 받게 할 정도로 노동자가 아닌 사용자 편에서 정치를 하고 있었으니 그 혜택을 사용자들은 크게 누리고 살아온 대한민국의 중소상인들 아닐까?
물론 지난 세월 중소상인에 대한 독재정권의 경영정책은 바닥이었다고 하지만,
1988년 최저시급 462.50원으로 시작된 노동자에 대한 대우도 바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잖은가!


노동을 시키는 측에서 노동자들이 고통스럽게 일을 해준 때문에 자신들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인정하면 衝突(충돌)될 일이 없을 것인데 사용자들 중 그렇게 인정하는 쪽은 그렇게 흔치않다고 본다.
분명 사용자는 노동자보다 넉넉하게 잘 살고 있지만 죽는 소리를 하는 인물들이 적잖다.
누가 거저 돈을 달라고 하지 않는데도 죽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살지만 잘 살아간다.
결국 씀씀이가 많아 스스로 자신의 사업을 망치는 중소 사업주도 적잖다.
그리고 임금을 많이 내주었기 때문에 망했다고 노동자 쪽으로 핑계를 돌리는 인물들도 적잖다.
전체적인 경영에서 노동자 임금 줄 것을 제일 먼저 손으로 꼽아 놓고도 경영 방법이 잘 못돼 사업을 성공할 수 없었다는 소리는 않고 임금 때문에 망했다고 한다.
그처럼 노동자에게 급료를 주는 것을 정말 아까워하는 사용자들이 너무 많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결여된 때문은 아닌지 의심하게 만든다.
그럴 것이면 사업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말이다.
그처럼 최저임금을 주면서도 죽는 소리를 할 것이면 무슨 사업이든 할 생각을 말라고 말하고 싶다.


대한민국 최저임금위원회는
최저임금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개념 및 연혁
최저임금제란 국가가 노·사간의 임금결정과정에 개입하여 임금의 최저수준을 정하고사용자에게 이 수준 이상의 임금을 지급하도록 법으로 강제함으로써 저임금 근로자를 보호하는 제도임※「헌법」 32조제1항에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하여야 한다고 규정(’87. 10)

우리나라에서는 1953년에 근로기준법을 제정하면서 제34조와 제35조에 최저임금제의 실시 근거를 두었으나당시 우리 경제가 최저 임금제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이 규정을 운용하지 않았음
70년대 중반부터 지나친 저임금을 해소하기 위하여 정부에서 행정지도를 하여 왔으나 저임금이 일소되지는 못함
저임금의 제도적인 해소와 근로자에 대하여 일정한 수준 이상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 주기 위하여 최저임금제의 도입이 불가피해졌고,
우리 경제도 이 제도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였다고 판단하여 1986. 12. 31.에 최저임금법
제정·공포하고 1988. 1. 1.부터 실시하게 됨

최저임금제도 목적
최저임금제는 근로자에 대하여 임금의 최저수준을 보장하여 근로자의 생활안정과 노동력의 질적 향상을 꾀함으로써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함(최저임금법 제1)

최저임금제의 실시로 최저임금액 미만의 임금을 받고 있는 근로자의 임금이 최저임금액 이상 수준으로 인상되면서 다음과 같은 효과를 가져옴.

① 저임금 해소로 임금격차가 완화되고 소득분배 개선에 기여
② 근로자에게 일정한 수준 이상의 생계를 보장해 줌으로써 근로자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근로자의 사기를 올려주어 노동생산성이 향상
③ 저임금을 바탕으로 한 경쟁방식을 지양하고 적정한 임금을 지급토록 하여 공정한 경쟁을 촉진하고 경영합리화를 기함.


나무위키는
최저임금제의 역사와 배경에 대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 살아가게 하기 위해 1894년 뉴질랜드에서 도입한 게 시초이다.”라고 적으며 다음과 같이 이어가고 있다.

1940년대 독일의 사회적 시장 경제학자인 발터 오이켄(W. Eucken)등이 최저임금제를 주장하였다노동시장에서 임금이 하락하면 수요 공급의 원칙에 따라 노동 공급이 하락하고 그에 따라 임금이 적정수준으로 증가해야 한다그러나 현실은 임금이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면서도 노동 공급이 증가하는 반대 현상이 일어났다벌 수 있는 임금이 최저 생계비 이하로 낮으면 근로자들은 부족한 생계비를 벌기 위하여 잔업을 하거나 부녀자와 아동들도 일하게 되기 때문이다임금이 하락하는데도 불구하고 늘어난 노동공급은 노동자들의 임금이 더욱 낮아지는 악순환으로 나타난다발터 오이켄은 이러한 행태가 노동시장에서 자주 일어난다고 파악하였다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국가에서 최저임금을 설정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하였다.(나무위키)


이승만 시절의 대한민국 경제는 북한보다도 허덕이고 있을 때인 1950년대에서 최저시급이라는 단어는 교과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군사 독재자 박정희 시절인 1970년대에서는 시급이라는 말은 돌고 있었지만 정경유착의 시대에서 어림도 없는 단어일 뿐 경제인들 편에 붙어있던 박정희 정권이 국민을 위해 한 것이란 밤낮없이 혹사시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을 때이다.
오직하면 대학생들이 공단으로 숨어들어 노동자들과 함께 호흡을 하면서 공장주들의 橫暴(횡포)와 투쟁하다 경찰서와 중앙정보부로 끌려가는 상황 극들이 허구한 날 벌어지고 있었을 것인가?
농부들이 소[()]도 그렇게 부리지 않을 때 사람부리는 일을 경영주들 입맛에 맞게 멋대로 부려먹을 때 노동자들이 항의라도 하면,
박정희 독재정권은 노동자를 윽박지르지 않으면 빨갱이로 만들어 감옥으로 보내기 일쑤였다.
박정희 독재시대야말로 청춘들에게 정말 슬픈 시절이었지만 취직해서 먹고 살기만 해도 감지덕지라며 어른들은 참고 견디라는 말씀 외에 다른 말씀을 할 수 없었던 시절을 우리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


대한민국에 최저임금법이 시행된 것은 이제 30년의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상황이다.
신군부 독재자 전두환이 허용을 한 것을 1987년 6.10민주항쟁에 의해 노태우의 6공화국 개헌의 시기를 거친 뒤 가까스로 최저임금법이 시행하기는 했지만 어림도 없는 정말 최저임금 중의 최저임금을 지불하게 한 대한민국의 과거를 보게 했다.
그렇게 작게 출발된 임금을 받으며 서민들은 살아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최저임금 때문에 너도나도 가게를 내고 남을 부렸던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결국 중소상공인들 중 독재자 박정희와 전두환 시대를 거치면서 대한민국 최저임금법도 없는 상황에서 크나큰 혜택을 받았던 업주들도 不知其數(부지기수)로 많았을 것이다.
지금 막 시작하는 사업주는 그런 혜택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賃金(임금)의 중요성을 더 잘 알 수 있을 테니 논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지만 말이다.
단지 몇 년 사이 사업을 벌려 논 업주들은 2017년과 2018년 사이 상승된 16.4%의 최저임금을 겁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나 대한민국은 독재자들 때문에 최저임금은 지금도 큰 액수는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으로 본다.


문재인 대통령의 2020년까지 10,000원 최저임금이 결코 무리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지금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최저시급이 크다는 것을 느끼고 있지,
일자리가 많아지면 그런 그림자는 금세 지워지게 될 것으로 본다.
노동자를 부릴 시급이 무서운 주인이라면 그런 사람은 남의 밑에서 일을 해야 할 爲人(위인)이지,
남을 부릴 만큼 큰 偉人(위인)으로 성장할 사람은 아니라고 본다.
남을 부리면서 죽는 소리를 하는 사람 밑에서는 그 회사 노동자가 마음 놓고 일 할 수 없게 된다.
죽는 소리를 하는 주인 밑에서 누가 일하고 싶을 것인가!
자기 혼자 꾸리며 살게 하든지 한시바삐 그 집을 탈출하는 것이 효과적일 게다.
易地思之(역지사지)할 용기도 없는 주인에게 누가 자기 삶을 맡길 것인가!
大汎(대범)한 사람을 주인으로 섬겨야 종업원도 그 品性(품성)을 傳受(전수)받아 먼 훗날 그 주인처럼 멋있는 회사를 꾸릴 수 있는 人品(인품)으로 성장하게 될 것으로 본다.
2020년까지 노동자에게 한 시간 당 10,000원을 지급할 수 없다고 하는 주인들은 사주가 될 偉人(위인)이 못되거나 아니면 혼자만 잘 살기위해 꼼수를 부리는 不德(부덕)한 주인이라는 것을 빨리 알려야 할 것으로 본다.
문재인 정부도 莫無可奈(막무가내밀고 나가지 않겠지만 참된 주인이 되고 싶으면 자신이 쓰던 경비를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먼 미래의 평화의 발판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주인이 되어주길 부탁하고 싶다.


남을 이끄는 주인이든 지도자는 남에게 卑屈(비굴)한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不屈(불굴)의 굳은 意志(의지)를 발휘하여 사업체든 지도체제를 크게 늘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지 죽는 소리를 하며 아르바이트보다도 못한 돈으로 살아간다고 卑怯(비겁)하거나 醜雜(추잡)한 소리를 하지 않는다.
좀 더 멋있고 활기찬 주인이 되고 싶지 않으면 작은 장사라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 스스로에게 물론 사회에 큰 德行(덕행)이 되지 않을까 본다.
돈이 많지도 않으면서 은행 빚을 내고 사채 빚을 내고 허풍을 떨던 시대는 독재시대에서는 할 수 있었던 일이지 알차게 익어가는 사회에서는 적폐에 불과할 것이다.
스스로를 위하는 마음을 쓰는 사람이 사회에도 獻身(헌신)하는 것 아닌가?
돈 좀 있다고 작은 사업 벌리면서 아르바이트 학생들 최저임금도 지불 할 수 없다며 길거리 데모나 할 생각이라면 아서야 할 일이다.
큰 그릇은 입으로 하지 않고 묵묵히 행동으로 옮긴다.
섣불리 데모에 가담하지 말고 사회를 위해 살아가면 어떨지?
국가가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를 만족하는 길을 택해야 나라가 조용해지지 않던가?
30년의 짧은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 최저임금제도가 좋은 결실을 맺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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