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13일 일요일

대한민국 육군에 친일파가 많게 된 이유는?



육군 군가 중 친일파 작곡가 노래 35곡이나?

'육군가'가 친일파 김동진이 작곡한 노래라고 이제야 발표하고 있다.
육군 훈련소에 들어가면 배우는 첫 노래로 아는 그 군가를 수십 년이 지난 이제야 알게 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추측건대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서 문제가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이 같이 한 광복군이 교활한 이승만 전 대통령(이하 이승만)에 앞서 고국에 귀국만 했더라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인데 말이다.

이승만 - 맥아더와 이승만

한반도 역사에서 일제 강제점령기(강점기)가 삽입되지 않았다면 미군도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고 남북 분단도 없는 나라로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아 '일본'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명쾌하지 않을 때가 적잖다.
더불어 '친일파'라는 단어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時流(시류)에 따라 사람들 마음이 움직인다고 하지만 국가를 빼앗기고도 시류에 따라 나라를 배반한 친일파는 내게 있어 피를 나눈 민족과 형제도 아닌 인간으로 이해해버릴 때가 종종 있다.
오죽했으면 그런 결정을 했을까 하는 惻隱(측은)한 마음을 갖추려고 해도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친일파들을,
이승만은 입으로는 친일파 척결이라 하면서 정부 요소마다 그들을 심어두고 잘도 부려먹으며 독재정권에 도취돼 나라를 곤욕의 구렁에 빠지게 한 것이다.
정권 욕심이 지극히 강한 이승만은 미국의 힘에 붙어 상해 임시정부를 무시하고 있었다.

김구 선생의 안일함도 없지 않았기에 이승만이 미국과 결탁하는 것에 당하기만 했던 해방 이후 사건들은 우리 민족을 완전 두 동강으로 나눠지게 하지 않았던가?
많은 역사가들이 이승만을 이완용 이상 교활한 인물로 보려고 하는 것도 이승만이 지나치게 미군의 힘에 빌붙어 처리했던 과거사를 두고 하는 것이다.
임시정부에서 분명한 광복군의 힘이 있었지만 김구 선생을 위시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이승만 보다 뒤늦게 입국(1945.11.23.) 하였기에 대한민국은 친일파들을 쉽게 척결하지 못하고 지금껏 그들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많은 역사가들도 하고 있을 것이다.

맥아더기념관에서 만난 소름끼치는 사진들

이승만이 일본을 거쳐 태평양 최고 사령관인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장군과 도쿄에서 만나 주한 미군 사령관 겸 미 군정청 사령관으로 막 부임되는 존 하지(John Reed Hodge 1893~1963) 장군과 결탁한 다음 1945년 10월 16일 홀로 귀국하여 미 군정청을 방문한다.
약삭빠른 이승만의 정권 착취 작전에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은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으며 결국 대한민국 국군도 친일파 세력에 끌려가야만 했다.
국방일보는 2018년 12월 6일 자 보도에서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군사사 12월 5일] 1945년 군사영어학교 창설

1946년 1월 15일 군사영어학교(Military Language School)가 문을 열었다광복 후 우리나라 최초의 장교양성기관이다.
군사영어학교는 당시 서대문구 냉천동에 위치한 감리교 신학교 안에 위치해 있었다지금도 감리교 신학대학 내에 본관 건물 모습이 남아 있다.

당시 미 군정청은 국방경비대 창설을 앞두고 무엇보다 건군 요원과 통역관 등 간부 양성을 고려했다미 군정청은 군사영어학교의 입교 자격으로 준사관 이상의 중등학교를 졸업한 군 경력자라는 제한을 두었다.

최초 일본군·만주군·광복군 출신으로 나눠 20명씩 선발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그러나 광복군 출신들은 일본군 출신을 선발하고자 하는 데 대한 거부감과 함께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응시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군사영어학교(교장 미군 리스 소령)에 입교한 이들은 당시 부교장으로 임명된 만주군 중교(현재 중령급출신의 원용덕과 미 군정 고문이었던 일본군 대좌(대령출신인 이응준이 추천한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군사훈련 과정은 별도로 없었으며교육 내용은 군사영어로서 중대·대대·연대·사단 같은 단위부대 이름과 작전 및 훈련 용어간단한 일상용어 같은 기초영어를 가르치는 과정이었다.

군사영어학교는 1946년 4월 30일 폐교될 때까지 총 200명이 입교해 110명이 졸업했다일본 육사 출신 13명을 포함한 일본군 출신이 87만주군 출신이 21광복군 출신이 2명이었다.

군사영어학교 뒤를 이어 국군 장교 양성기관으로 5월 1일 태릉에 남조선 국방경비사관학교를 창설되었다.

한국군 초기 장교단은 이렇듯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의 압도적인 인원으로 구성되었으나 후에 철기 이범석은 국방부장관으로 취임하면서 육군사관학교 입교생 확대와 특별기 임관 제도를 통해 광복군 출신들을 대거 영입함으로써 일본군·만주군 위주의 초기 장교단 인원 비율을 뒤바꿀 수 있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은 1968년까지 한국군의 수뇌부를 형성했다.(국방일보)

‘국군의 산실’ 군사영어학교가 있던 감리교신학대학교

건물도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장시간 버틸 수 없는 것처럼 대한민국 국군은 일본군 교육을 받은 자들이 기초가 된 것이다.

미군 방식 교육으로 미군 군사영어학교에서 했다고 해도 단기 교육에 그친 그 방법이 얼마나 먹혔을 것이며 철두철미하게 민족의 피까지 바꾸려 했던 일본식 육사와 군대 교육을 받은 자들이 대한민국 군대를 이끌었으니 아직도 대한민국 육군가의 작곡가가 김동진이었다는 것도 모르고 수십 년 부르게 한 것이다.

육군가 뿐 아니라 35곡의 군가들이 더 있다고 한다.
친일의 절대자 박정희 독재자가 정권을 잇고 있었으니 대한민국 군대가 어찌 바른길로 갈 수 있었을 것인가!

비참했던 대한민국은 군가까지 친일적이었다는 말 아닌가!
한반도 국민이었다면 민족적 양심을 갖추면서 정의롭게 살았어야 했다.

작곡가 김동진의 친일이 슬픈 이유는 피를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자고 한 것보다 일본인들의 부당한 세력들을 더 미워하게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안에도 말도 되지 않는 사상을 갖춘 이들이 있는 것만큼,
일본국 속에는 더 많이 있다는 것이 세계적으로 아주 큰 문제인 것이다.
제발 不當(부당)을 正當(정당)하다고 하는 세상에서 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명복을 빕니다]작곡가 김동진 선생

원문 보기

댓글 없음:

댓글 쓰기